철원사형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38
한자 鐵原私刑事件
영어공식명칭 Cheorwon Sahyeongsag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7년 06월 26일연표보기 - 철원사형사건(鐵原私刑事件)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27년 07월 04일연표보기 - 철원사형사건 철원지방법원지청 불기소 처리
발생|시작 장소 철원사형사건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중리 지도보기

[정의]

1927년 강원도 철원지역의 일본인 농장에서 오디를 따던 조선인 여자아이를 일본인 농장주가 흉기로 상해하여 전 국민의 분노가 폭발한 사건.

[개설]

철원사형사건(鐵原私刑事件)은 1927년 여름 강원도 철원에 사는 8살 조선인 여자 아이가 일본인이 운영하던 과수원에 들어가 오디를 따먹다가 잡혀 두 군데나 허벅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상해를 입는 일이 발생하여 전 국민 분노가 폭발하였던 사건이다. 해당 일본인을 즉시 체포하여 엄중 처벌하라는 전국적인 성명이 빗발쳤고 일본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다. 경찰은 전국적인 소요사건으로 번질까 우려하여, 관련 집회를 엄금하고 여론을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수사와 재판을 일사천리로 진행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가운데 발생한 사건이어서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사건의 처리 과정 여하에 따라 전국적인 저항에 부딪칠 수 있는 사건이었다. 1927년 6월 26일 오후 6시 반경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중리 오흥순(吳興順)의 장녀 오순덕(吳順德)[8세]과 이웃집 아이 두 명이 일본인 등택창태랑(藤澤暢太郞)의 과수원에 들어가서 오디[뽕 열매]를 따먹었다. 마침 주인인 등택이 자기 아들[10세]을 데리고 과수원을 걷다가 오디를 따먹는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지르며 급히 쫓아가서 오순덕을 잡았다. 오순덕은 왼쪽 넓적다리에 살덩어리가 두 곳이나 떨어져 나가고 또 한 곳은 상처가 나 피를 흘리고 울며 집으로 돌아갔다.

[경과]

상처를 본 아이의 부모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즉시 경찰에 신고하였다. 1927년 6월 27일 새벽 3시경 철원경찰서의 순사 두 명과 협성의원 원장이 오순덕의 집에 가서 상처를 조사한 결과 과수를 가꾸는 가위로 살점이 베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6월 27일 밤 12시경 격분한 군중 100여 명이 일본인 집을 에워싸고 항의하는 것을 철원경찰서원이 출동하여 겨우 돌려보냈다.

해산 당한 군중들은 얼마동안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새벽 1시경 철원청년회관에 모여 임시대회를 열고 약 300여 명이 흥분된 가운데 대책을 논의하였다. 새벽 2시경 철원경찰서에서 밤이 깊었다는 이유로 다시 강제 해산시켰다. 한편 모임을 주동한 은희송(殷熙松) 외 3명은 잠시 끌려가 조사를 받고 돌아갔다.

처음 오순덕의 상처를 치료한 협성의원 의사 이익수(李益秀)는 분명 절창(切瘡) 칼이나 유리조각 따위의 예리한 날에 의해서 베인 상처라고 단정하였으나, 추방(諏訪) 공의(公醫)는 확실한 진단을 미룬 채 피부가 찢어진 부상 열창(裂瘡) 같다고 말해 향후 사건 규명과 재판 진행에 커다란 쟁점으로 부각될 조짐이 나타났다. 가해자 등택창태랑(藤澤暢太郞)은 현장에서 가위를 갖고 있지 않았고 그 아이가 철책에 걸려 넘어져 난 상처라고 변명하였으나 그 날 저녁 이미 경찰서에 있을 때 가위를 갖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의혹은 더 커졌다. 게다가 경부 김용식(金龍式)이 나중에 일부러 철책을 끊어 놓고 베 조각까지 매달아 놓는 등 사건을 조작하려고 하여 주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결과]

1927년 7월 3일 오후 1시 총독부의원 소천(小川) 박사가 철원 공의와 조선인 의사 입회 아래 사건 진단을 하였다. 7월 4일 감정서가 도착하여 철원지방법원지청 정원(井原) 검사는 경찰에 구금되었던 가해자 등택창태랑(藤澤暢太郞)을 석방하고 불기소 처리하였다. 사건 피해자인 오순복을 도우려 나섰던 후원자인 철원청년회원 은희송은 오히려 오순복을 위해 모집한 동정금 60여 원 중 20여 원을 여러 가지 비용에 쓴 것이 잘못되어 횡령죄로 기소되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았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철원사형사건(鐵原私刑事件)과 유사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사건으로 일제 강점기 철원 지역 식민지 지배 양상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