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보위훈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55
한자 祖國保衛訓鍊
영어공식명칭 Chogukbowihunry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9년연표보기 - 조국보위훈련 실시

[정의]

1949년 공산 치하 철원에서 남침 전쟁 준비를 위하여 행하여진 전방위 군사훈련과 인민군 강제징집.

[개설]

6·25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부터 북한은 인민유격대를 침투시켜 혼란을 조성하고 인민들에 대한 군사 훈련과 징집을 강화하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북한 인민에 대하여 1948년까지는 만 17세부터 50세까지의 전 남성 대상으로 직장에서 일하면서 기초 군사훈련을 실시해 오다가, 1949년 들어서는 한 주에 두 번씩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다. 고급 중학교[한국의 고등학교] 이상의 모든 학교에는 배속장교를 배치하여 학생들에 대한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신검 대상이 되는 전 인민에 대하여 1949년 여름까지 신체검사를 완료하는 등 북한 인민의 병력동원에 대한 준비를 완료하였다. 북한 인민을 상대로 남한 인민들을 구하고 조국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민군대 무력 강화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인민군 입대를 적극 권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강원도 철원에서도 많이 나타났다.

[주요 사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에 살던 김송일(金松一)[1931년 생]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철원고급중학교[고등학교] 2~3학년을 대상으로 군관학교[사관학교] 지원자를 선발하였는데, 사상적으로 탁월한 학생만 가능하였고 동료 중에 5~6명이 뽑혀 갔다고 하였다. 김송일은 1950년 7월 6일 철원고급중학교에 집결하여 자원입대해야 하니 집에 가서 부모에게 인사하고 오라고 하여서, 집에 와서는 곧바로 산속으로 은신하였다. 사흘을 숨어 지내다가 아버지가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게 되니 1950년 7월 15일 자수하여 입대하게 되었다. 금학산 밑 훈련소에서 열흘 정도 군사훈련을 받고 1950년 8월 말 철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가서 탱크를 인수받아 바로 6·25전쟁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강원도 김화군 근북면 율목리가 고향인 김호선(金浩善)[1932년 생]에 따르면, 철원농업전문학교에서는 인민군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훈련을 많이 실시하였는데, 소대공격, 중대공격, 대대공격 등의 전술과 소총[목총] 16개 동작의 훈련이 반복되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100명 단위로 수시로 인민군에 보내졌다. 김호선 자신도 학교로 오라는 통지에 20명 학생들이 함께 인민군에 끌려가 안변으로 집결하였는데, 거기에서 도망 나와 1주일 이상 걸려 돌아 돌아서 집에 왔다고 하였다.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 양지리 출신 김규장(金圭章)[1931년 생]에 따르면, 1950년 7월 15일이 학교 방학이고 방학 전 시험기간인 7월 7일에는 물리시험 보던 날인데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고 시험이 끝나자 모두 강당으로 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강당에 가니 이미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는데, 여학생들이 ‘조국과 인민을 위한 해방전쟁’에 나서라며 혈서를 써 가며 인민군 참전을 독려하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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