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지구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479
한자 金城地區戰鬪
영어공식명칭 Geumseongjigu Battl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3년 06월 10일~1953년 06월 18일 - 중공군 금성천 일대 주요 고지 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3년 07월 13일연표보기 - 한국군 중공군 격퇴, 금성천 이남 지역 탈환 시작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3년 07월 19일연표보기 - 한국군 중공군 격퇴, 금성천 이남 지역 탈환 종료
성격 전투

[정의]

6·25전쟁 중 1953년 6월과 7월 지금의 철원 지역인 김화에서 한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개설]

금성지구 전투는 지금의 철원군 지역이 포함된 당시 강원도 김화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금성지구 전투는 1953년 6월과 7월 금성지구 북방에 위치한 중공군이 중동부 전선에 돌출된 한국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중공군 4개 군[54군·60군·67군·68군] 산하 12개 사단, 23만 6100명의 병력을 동원한 전투이다. 금성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은 한국군 5개 사단[수도사단·3사단·5사단·6사단·8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화천의 금성 돌출부에 대한 최후 공세를 감행하였다.

[역사적 배경]

1952년 10월 초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진행되던 휴전회담은 포로 교환 방법에 대한 이견으로 결렬되었다. 휴전회담이 결렬되자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와 김화 오성산 동남방 능선인 저격능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예상하지 못한 대규모 반공포로 석방으로 휴전회담은 또 결렬되고, 전선은 다시 긴장 상태가 되었다.

[경과]

1953년 6월 10일부터 18일 사이에 실시된 6월 공세에서 중공군은 20병단 예하 2개 군[60군·67군] 6개 사단이 한국군 5사단과 8사단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금성천 일대 주요 고지들을 확보하였다. 이후 1953년 7월 13일부터 19일 사이에 실시된 7월 공세에서 중공군은 20병단 예하 4개 군[54군·60군·67군·68군] 산하 12개 사단이 금성지구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하여 정면과 측면에서 한국군을 공격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690고지와 485고지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1953년 7월 15일부터 한국군이 2군단 예하 5사단, 8사단, 11사단으로 주 저항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개시하여, 7월 19일 금성천 이남 지역을 탈환하였다.

[결과]

금성지구 전투에서 한국군은 중공군 사살 2만 7216명, 부상 3만 8700명, 생포 186명, 무기 노획 1,428정 등 큰 전과를 올렸다. 반면 한국군은 1만 4373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6·25전쟁 사상 초유의 승리로 한국군은 중공군을 격퇴하고 금성지구 탈환에 성공하였다.

[의의와 평가]

금성지구 전투6·25전쟁에서 최후의 전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금성지구 전투 전적비는 1957년 7월 15일 육군 제3·6·8·11·수도사단이 건립하였으며, 현재는 육군승리부대가 관리하고 있다. 매년 6월 국군장병들의 공적과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식이 거행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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