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588
한자 九隱事蹟碑
영어공식명칭 Memorial Monument for Kooeun[Sajeokb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호국로 7003-23[사곡리 679]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원미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42년 04월연표보기 - 구은사적비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77년 9월 - 구은사적비 이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435년 - 김시습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493년 - 김시습 사망
현 소재지 구은사 사적비 -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구은사지도보기
원소재지 구은사 사적비 -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구은동]
성격
양식 비의 머리 부분에 개석을 씌운 비좌개석(碑座蓋石)형
재질 화강암[개석]|대리석 오석(烏石)[비신]|화강암[대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280㎝[전체 높이]|130㎝[비석 높이]|48㎝[폭]|19㎝[두께]

[정의]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구은사에 있는 단종 복위를 도모한 구의사의 충절을 기려 일제 강점기에 세운 사적비.

[개설]

구은사적비(九隱事蹟碑)가 소재한 구은사(九隱祠)는 1455년(단종 3)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은거하며 단종 복위를 도모한 구의사(九義士)를 모신 사당이다. 구의사는 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曺尙治), 박도(朴渡), 박제(朴濟), 박규손(朴奎孫), 박효손(朴孝孫), 박천손(朴千孫), 박인손(朴璘孫), 박계손(朴季孫) 9명을 가리킨다. 구은사는 1818년(순조 18)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고 1921년 복원되었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1979년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건립 경위]

구은사적비는 단종 복위를 도모한 구의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42년 4월 건립되었다. 1977년 9월 구은사를 중건하면서 구은사적비를 사우(祠宇) 내로 이건하였다.

[위치]

구은사적비가 있는 구은사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에 있는데, 원당에서 마현리로 가는 국도의 삼거리에서 박창령 신도비 앞쪽 산 아래에 있다.

[형태]

구은사적비는 비의 머리 부분에 개석을 씌운 형태이고 개석은 팔작지붕이며 대석은 문양이 없이 단조롭다. 개석과 대석은 화강암이고 비신은 오석(烏石)이다. 전체 높이는 280㎝이고, 비석 높이는 130㎝, 폭은 48㎝, 두께는 19㎝이다.

[금석문]

구은사적비는 앞면에 ‘구은사적비(九隱事蹟碑)’라고 새겨져 있다. 이범석(李範錫)이 찬(撰)하고, 민경식(閔景植)이 썼다. 금석문의 내용을 풀면 다음과 같다. “육신(六臣)은 절의에 죽고 구은(九隱)은 세상을 피하였으니 산 것이 죽은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니 길은 달랐지만 마음은 같았다네. 궁산(窮山)에 피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으니 동봉(東峯) 정재(靜齋) 두 선생과 손 맞잡고 옷깃 맞대고 걸었다네. 한 집안에 일곱 현인이여, 부자(父子) 형제(兄弟)였다네. 풀 엮어 초막 짓고 선생들이 쉬시던 곳, 백세청풍(百世淸風) 일으키시어 나부(懦夫)들을 격려하였도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빨고 창랑수(滄浪水)에 노 저었다네. 산마루에 흰구름이여 오고감에 막힘이 없도다. 나물 먹고 물 마시며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였다네. 정결하게 정성들여 조두(俎豆)를 올려 춘추로 제사 모시고 비석을 높이 세웠으니 천만년 가리로다.”

[현황]

구은사적비는 비의 마멸 상태가 양호하나 뒷면 윗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구은사적비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하여 불사이군의 충절을 실천한 구의사를 기리는 사적비이며, 구은사와 함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신하의 충절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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