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039
한자 八關會
이칭/별칭 중동팔관회(仲冬八關會)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홍승우

[정의]

지금의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고려 건국 직후 처음으로 개최한 국가적 종교 행사.

[개설]

팔관회는 신라, 태봉, 고려 등의 나라에서 베풀던 국가적 종교 행사이다. 고려에서는 거의 해마다 중동(仲冬)에 해당하는 음력 11월 보름에 개최하여 중동팔관회(仲冬八關會)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불교의 팔관재(八關齋)와 고려의 전통적인 산천 신앙 및 조하(朝賀)[동지, 즉위, 생일 따위의 경축일에 신하들이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던 일] 의식이 결합되어 인도의 팔계재(八戒齋)나 중국의 팔관재(八關齋)와는 다른 특성을 보였다. 고려 개국 후에 열린 최초의 팔관회는 918(태조 원년) 11월에 지금의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개최되었다.

[연원]

팔관회의 연원은 인도의 팔계재, 중국의 팔관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의 팔계재는 출가자의 계(戒)에 근거한 팔계를 재가 신도들이 하루 동안 지키는 의식으로서, 인도 고유의 액막이 풍속이 불교로 유입되면서 발생하였다. 팔계는 중국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토속의 액막이 관념과 결합하여 팔관이라는 명칭으로 중국 백성에게 유포되었다. 팔관재는 재액을 막아 병을 치료하거나 목숨을 구하고자 수행하는 의식, 또는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자 수행하는 의식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보였다. 늦어도 6세기에는 중국 백성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한반도 최초의 팔관회 기록이 남아 있다. 551년 거칠부(居柒夫)를 따라 신라에 귀화한 고구려 승려 혜량(惠亮)이 팔관의 법을 두었고, 572년 10월에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외사(外寺)에서 이레 동안 팔관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팔관회가 위령제의 성격을 띰과 동시에 그간 10월에 수행되었던 신라의 전통적 제천 의례와 서로 절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7세기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590~658]이 중국 태화지(太和池)를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고 팔관회를 베풀면 나라에 이롭다고 말하였다는 설화가 수록되어 있어, 중국의 팔관재가 신라에 유입된 후 호국적 불교 행사로 변모하였음을 보여 준다.

신라의 팔관회가 정례적으로 개최된 행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상 팔관회를 처음 정례화한 인물은 궁예(弓裔)[?~918]이다. 『삼국사기』 궁예전에서는 궁예가 898년 11월 팔관회를 시작하였다고 전하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전주(前主), 즉 궁예가 매년 중동팔관회를 개최하였다고 전한다. 궁예는 905년 도읍을 지금의 철원 지역으로 옮기고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왕건(王建)[877~?]은 고려 건국 후 궁예의 선례를 이어받아 918년 11월에 지금의 철원 지역에서 고려 최초의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위봉루(威鳳樓)에 올라 몸소 연회를 관람한 태조는 팔관회를 ‘부처를 공양하고 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供佛樂神之會]’으로 정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고려에서도 팔관회는 중동에 해당하는 11월 보름에 베푸는 것으로 정례화되어 중동팔관회로 불렸다. 중국 문화의 영향이 강했던 성종(成宗)[960~997] 시기에 일시적으로 폐지되었으나, 현종(顯宗)[992~1031] 시기에 복구된 이후로는 고려에 큰 변란이 없는 한 거의 매년 빠짐없이 치러졌다.

[내용 및 특성]

고려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 가운데 제6조는 연등회(燃燈會) 및 팔관회와 연관되었다. 태조는 “내가 지극하게 바라는 것은 연등회와 팔관회에 있다.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기 때문이고, 팔관회는 하늘의 신령 및 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기 때문이다. 훗날 간신들이 이 행사를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 건의하면 결단코 금지하여야 한다.”라고 하여 팔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년 팔관회를 설행할 것을 후대의 왕들에게 주문하였다.

『훈요십조』에 명시되어 있듯 고려의 팔관회는 불교적 요소와 토속신앙적 요소가 혼재되었다. 정종(靖宗)[1018~1046] 시기에 확립된 팔관회 의식은 크게 소회(小會)와 대회(大會)로 나뉘어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소회에서 각종 기예와 가무, 백관들과의 연회를 즐긴 국왕은 저녁에 호국사찰인 법왕사(法王寺)로 행차하여 부처와 보살뿐 아니라 토착신들에게 분향하였다. 대회 때에는 지방관들의 축하 글을 받아 우열을 가렸고, 여진·말갈·탐라(耽羅) 등 외국 사신들과 송나라·아라비아 상인들의 조하를 받아 황제국 체제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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