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1312
한자 韓半島中心部鐵原地域住民-集團移住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영규

[정의]

한반도 중심부 철원 지역 주민들의 유사 이래 세 번에 걸친 대규모 집단 이주와 정착 이야기.

[개설]

철원은 사민(徙民)의 땅이다. 궁예가 철원에 태봉국 철원성을 건설하고 도읍을 정할 때 청주 사람 1,000호를 이주시킨 이래 1,000여 년간 사민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철원평야에 향도농장·불이농장·팔랑농장을 개척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조선총독부를 통하여 소작농을 모집함으로써 철원군 동송읍 오덕리에 평안도촌, 장흥리에 함경도촌, 대위리에 경상도촌이 만들어졌다. 소작농들은 중앙수리조합이 설립되어 저수지 건설과 농지 개척에 동원되었고, 이후에는 농장에 소속되어 중세시대 농노와 같은 생활을 하였으며, 소작농 중 일부는 일제의 착취와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만주와 간도로 떠나기도 하였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해방과 더불어 분단되면서 운명이 갈렸고 대부분 6·25전쟁 때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전쟁이 끝난 후 철원평야에 또 다른 ‘사민사’가 쓰여졌다. 1959년 4월부터 1980년 11월까지 민통선 민간인 입주 정책으로 이주한 주민이 1,000호에 이르는데 이는 궁예의 청주 사민 1,000호와 거의 비슷한 숫자였다.

철원군은 한반도 중심부 지정학적 요충지 평야지대에 위치하여 시대에 따라 부침이 심하였다. 그리고 위정자들의 목적에 따라 주민들의 대대적인 집단 이주가 있었다. 이는 지역사회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이에 궁예로부터 시작하여 6·25전쟁 직후 민통선 이주정책으로까지 연결된 철원 사민의 역사를 짚어본다.

[궁예왕의 청주인호 1,000호 철원 사민(徙民)]

통일신라 왕자 출신인 궁예는 출생부터가 신이(神異)하여 향후 왕권을 해칠 불길한 징조라는 모함에 당장 궁예를 없애라는 왕명이 떨어진다. 구사일생으로 유모에 의하여 궁성에서 빼돌려져 세달사에 맡겨진다. 갓난아이 때 탈출 과정에서 한눈을 잃었고, 후일 자신을 버린 신라 왕조에 대한 증오심은 이때부터 잉태되었다.

891년 혼란한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영월 세달사를 뛰쳐나온 젊은 궁예는 가사(袈裟)를 입은 채 반(反) 신라 대열 전면에 나선다. 죽주[현 경기도 안성시]의 기훤, 북원[현 강원도 원주시]의 양길 등 초적 세력들과 손잡고 2년 만에 치악산을 근거지로 강원도 영월군과 평창군, 경상북도 울진군 등 강원도 남부 일대를 복속하였다.

894년 궁예는 600명 군사를 이끌고 강릉에 들어가 토호 김순식의 도움으로 3,500명 대군으로 거듭나고 장군 칭호를 얻는다. 편제도 갖추고 기세가 오른 궁예 군대는 895년~896년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강원도 인제군, 화천군, 금성군, 김화군을 거쳐 단숨에 철원군까지 다다른다. 군세가 매우 커지자 897년 패서(浿西) 지역 호족들과 왕건(王建) 부자가 귀부(歸附)해 군사력과 경제력은 더욱 커졌고, 이를 기반으로 898년 송악(松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중부 남한강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국가 체계를 갖추게 된 궁예는 901년 고려(高麗)[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대한민국의 영어 국명(國名)인 코리아(Corea)가 탄생한 것이다. 만주 일대를 호령하던 고구려를 이어 대제국 건설을 꿈꾸던 궁예는 904년 철원 북방 풍천원(楓川原)에 청주 사람 1,000호를 이주시키고 궁궐을 짓는다. 이 무렵 국호를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905년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게 된다.

궁예는 898년 송악 천도를 전후하여 패서도와 한산주 일대, 한강 하류 지역을 확보하였고, 899년 양길과의 대결을 통해 청주 일대까지 장악하였다. 양길 세력을 장악한 이후 궁예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조하면서 반(反) 신라 정책을 피력하였다. 905년 철원 환도(還都)[정도]는 신라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목적으로 하였고 견훤(甄萱)의 위협을 막는 효과를 둔 조치로 파악된다. 특히 천도 과정에서 궁예는 청주(淸州) 세력을 대거 사민(徙民)시켰는데 홍승기는 「궁예왕의 전제적 왕권의 추구」에서 청주 세력을 궁예의 군사적 기반으로 파악하거나 궁예의 정권 핵심이 송악 세력에서 청주 세력으로 바뀐 것으로 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갑동은 「고려 건국기의 청주 세력과 왕건」에서 청주인 사민 정책을 집단 인질적인 성격으로 파악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이 지역의 반(反) 신라적 성향이 고려되었다. 신호철은 “궁예는 태어나면서 중앙의 정쟁 때문에 지방에서 숨어살게 되는데, 그곳이 청주였던 것으로 생각된다.”라며 “청주와의 이 같은 연고성 때문에 청주 사람 1,000호를 철원으로 옮겨 축성을 하고 군사적 기반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일제 강점기 전국에서 소작농 1,500호 집단 이주]

철원평야 개척의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은 조선중앙수리조합(朝鮮中央水利組合) 설립이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 1월 1일 기존에 있던 철원수리조합(鐵原水利組合)을 평강군(平康郡)까지 확장하여 규모를 6,000정보에서 8,500정보로 늘리고 이름도 중앙수리조합(中央水利組合)으로 바꿀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의 중앙을 의미하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수리조합을 철원에 설치한 것은 철원군의 지정학적 가치와 정치·경제적인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었다. 이미 전라북도 임익(任益) 및 평안북도 대정(大正) 양 수리조합 설립에 공을 세운 일본인 후지이 간타로[藤井寬太郞]를 강원도 철원과 평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수리조합의 대표로 선정하였다.

조선중앙수리조합은 철원·평강 양쪽 군 10개 면에 이르고 관개지(灌漑地)는 9,000정보이며, 약 400정보나 되는 저수지를 4개 설치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 화산지대인 철원 지역은 원래 벼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 이러한 곳에 1922년 10월 1일 불이흥업회사(不二興業會社) 관계자 및 조선인 유력자의 발기(發起)로 조선중앙수리조합을 창립하여 수리(水利)를 통해 미곡 주산지로 만들고 조선 빈민 수천 호를 수용하여 4:6 비로 소작하게 할 계획을 세웠다.

조선중앙수리조합 성립 후 1924년 조선총독부는 철원평야 개척과 소작을 담당할 노동자들을 전국으로부터 대거 모집하여 이주시킨다. 수리조합을 세워 저수지를 만들고 새로운 농지를 개간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우선 제1회로 1,500호의 조선인 노동자를 철원으로 대거 이주시켜 당해 수리조합이 경영하는 개답(開沓) 작업에 종사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철원의 중앙수리조합은 원활한 개답을 위해서는 최소한도 1,500호의 주민이 필요하다고 요청하였다. 1924년 4월 10일 선발진 약 500호가 철원에 영주할 목적으로 이주하고 나머지 1,000호도 곧 차질 없이 진행해 조선 내 노동자 생활을 안정케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가 국가 전체적인 노동력 조절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수리조합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그리고 당시 이주하는 이들은 선조 대대로 경작하던 옥토를 일본인들에게 강탈당하고 생계가 막막하여 어쩔 수 없이 온 사람들이었다.

불이흥업회사가 경영하는 불이농장은 군산(群山)과 용암포(龍岩浦) 등 각지에 광대한 토지를 점유하여 곳곳마다 마치 소왕국이 건설되어 있는 것 같았다. 불이철원농장에서는 철원군 일대 8,800정보라는 광대한 토지를 획득하자 토지를 경작할 소작민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이민을 데려오는 것보다 조선 안에서 임금이 낮은 조선 농민을 모집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개답조합이라는 것을 조직하고 1924년 정월부터 조선 내에 선전하여 이민을 모집하였다. 불이흥업회사에서는 이민 모집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당국에서는 이민 모집을 소작문제가 자주 일어나는 전라도에서 주로 모집하려 하였으나, 불이흥업회사에서는 전라도 농민의 성질이 불량하다 하여 오히려 전라도만 제외하고 전국의 각 도지사에게 이민 모집 권유를 의뢰하였다. 각 도지사의 권유에 의하여 각 군 면장들이 면내에서 모집하였는데 당시 철원 농장으로 이사한 이민자 수는 다음과 같다. 함경북도 120호 520명, 함경남도 25호 150명, 황해도 70호 350명, 평안남도 25호 100명, 강원도 5호 35명, 경기도 5호 20명, 충청남도 5호 20명, 경상남도 3호 10명, 평안북도 15호 79명, 충청북도 기타를 합해서 총 300호, 1,300여 명에 이르렀다.

지금도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에 평안도촌(平安道村)과 경상도촌(慶尙道村)이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 철원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동향 출신끼리 자연히 한데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서로 의지하면서 고된 타향살이를 이겨냈다. 평안도촌은 평안촌 또는 피양촌이라고도 불리는데 철원군 동송읍 대위리[오덕6리 송학동]와 장흥2리 지역에 형성되었다. 철원평야대야잔평[장흥리·오덕리·대위리 벌판] 농경지대는 조선 말기까지 옛 황실의 궁방전(宮房田)이나 역둔전(驛屯田) 등으로 대부분 미개척지로 방치되어 있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면서 이곳을 일본 회사인 불이농장이 점유하였고 이를 개간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개척 이주민을 물색 중이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날 무렵 평안도 용천·정주 지방에서 김정기(金禎耆), 김목겸(金睦謙), 김창준(金昌濬), 정택건(鄭宅健), 장원태(張元泰) 가족들을 비롯한 20여 세대가 지금의 대위리 지역과 장흥2리 지역에 이주 정착하면서 불이농장 소작과 미개척지를 개간하여 빈민 생활을 영위하며 살았다. 평안도촌 사람들은 1930년 3월 1일 동송보통학교를 창설하였고 준공 당시 증표로 학교 정문을 설립하여 현재까지 보존 관리되고 있다. 경상도촌은 1927년 경상북도 영천군, 영주시, 하양군 등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철원군 동송읍 오덕리장흥리 지역 자연부락인 도덕동, 강회동, 송대동, 부흥동, 신평동 등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이주 당시 김씨, 권씨, 이씨, 손씨 등 4개 성씨가 주축이 된 10여 세대가 장흥2리 새말에 이민촌을 이룬 것이 경상도촌의 시초이다.

[수복이후 민북마을 개척에 따른 집단 이주]

수복 초기 주민들은 미군정이 새롭게 건설한 민통선 밖 정착촌 막사에 머물며 일일 출입 허가를 받아야만 민통선 안 자기 농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농사일이 바쁜 농번기철에는 출입 허용 시간을 연장해 달라는 주민들 요구가 빈번하였고, 군부대는 작전상 불가하다고 맞섰다. 안보가 최우선인 1960년대~1970년대에는 주민과 관공서가 관할 부대장의 눈치만 보아야 하였다. 어떤 이는 자기 논에 조금이라도 물을 더 댈 욕심에 몰래 움막을 짓고 논에서 하루 이틀 목숨 걸고 숙박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후에 아예 농번기 때에 농사지을 남자들만 일정한 기간 동안 통제된 장소에 모아 놓고 천막에서 숙영하는 가유숙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군인들의 점호를 받아야 하였다. 전쟁의 상흔이 가라앉고 체제가 안정되면서 주민들의 옛 고향 입주에 대한 열망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부는 휴전선 인근 수많은 황무지와 유휴지를 개척하여 농지 확장은 물론 식량 증산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고, 첨예한 남북 대치 상황에서 국가안보 체제도 강화하고 대북 심리전에서 우위를 확보할 목적으로 민북마을[선전마을]을 건설하게 된다.

민북마을은 일반적으로 전략촌이라고 통칭되는데, 실제로는 입주 배경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민북마을 명칭으로는 초창기 자립안정촌과 이후에 가장 많이 건설된 재건촌,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경기도 파주시 대성동과 강원도 철원군 근북면 유곡리 두 곳에만 시범적으로 건설된 통일촌 등이 있다. 민북마을이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되는 기준은 조성 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마을 조성 과정에 정부가 얼마나 깊숙이 주도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철원군에서는 1959년 철원읍 월하리 72세대를 필두로, 1968년 철원읍 대마1리 150세대, 대마2리 97세대, 1970년 김화읍 생창리 100세대. 1973년 김화읍 유곡리 60세대, 1974년 갈말읍 동막리 50세대, 정연리 120세대, 1979년 동송읍 이길리 68세대, 양지리 100세대, 1980년 관전리 32세대, 1960년 근남면 마현1리 66세대, 1968년 마현2리 60세대 등 총 14개 민북마을을 조성하여 975세대를 입주시켰다. 그러나 입주 초기 너무 근시안적으로 공사해 1970년대 후반 대대적으로 보수한다. 1979년 민북 지구 취락 구조 개선사업이 완수되면서 민북마을은 ‘전쟁의 상처를 딛고 새롭게 도약하는 문화촌’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한다.

월하리는 철원군 민북마을 중 수복 후 가장 먼저 입주하였다. 1959년 4월 10일 전방 지역 출입 영농민 72세대[원주민 14세대, 외지인 58세대] 353명이 별도의 정부 지원 없이 자력으로 입주하였다. 이렇게 정부 지원 없이 입주한 형태를 자립안정촌이라 부르는데 훗날의 재건촌이나 통일촌과는 구분된다. 관전리는 1980년 11월 29일 32세대[원주민 8세대, 외지인 24세대] 175명이 월하리로부터 분가하였다. 대마리는 1968년 민통선 북방 지역 농지 개간과 정부의 재건촌 건립 계획에 의거하여 반공정신이 투철한 제대 군인과 지역 주민 위주로 선발하여 150세대가 입주하였다. 양지리는 오랜 기간 일일 영농 출입을 하다가 다른 지역보다 늦은 1979년 9평 단독주택에 두 가구씩 모두 100호가 입주하였다. 유곡리는 전선 방위는 물론 유휴경지 활용을 목적으로 대북한 우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건설된 선전 마을 통일촌으로 1973년 경기도 파주 통일촌과 같은 날 60세대가 입주하였다. 생창리는 일제 강점기 경원선과 금강산선 전철이 지나던 마을로 1970년 10월 30일 재향군인 100세대가 재건촌을 이루어 입주하였다. 마현1리는 1959년 가을 추석에 불어 닥친 사라호 태풍으로 인하여 발생한 경상북도 울진군 이재민 66세대를 정책적으로 이주시킨 경우이다. 마현2리는 1968년 8월 30일 60세대가 입주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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