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565
한자 洪命耉忠烈碑
영어공식명칭 Hongmyeonggu Memorial Ston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길 603[읍내리 63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원미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45년연표보기 - 홍명구 충렬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96년 - 홍명구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37년 - 홍명구 사망
현 소재지 홍명구 충렬비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지도보기
성격
양식 비의 머리 부분이 둥근 모양인 비좌원수(碑座圓首)형
재질 규석|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95㎝[비신 높이]|90㎝[폭]|21㎝[두께]|118㎝[비석받침 가로]|62㎝[비석받침 세로]|28㎝[비석받침 높이]

[정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에 있는 병자호란 당시 김화 백전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 후기 문신 홍명구를 기리는 비.

[개설]

홍명구(洪命耈)[1596~1637]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字)는 원로(元老), 호는 나재(懶齋),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아버지가 병조참의 홍서익(洪瑞翼)이다. 1619년(광해군 1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시골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등용되어 1625년 부수찬(副修撰)을 지내고, 1627년 직강(直講)을 거쳐 교리(校理)·이조좌랑(吏曹佐郎)·좌부승지(左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633년 우승지(右承旨), 1635년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을 거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아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다가,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는 소식이 전하였다. 그러자 근왕병(勤王兵) 2,000명을 거느리고 남하하다가 김화(金化)에 이르러 청군과 맞서 싸우다가 42세에 전사하였다.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1645년(인조 23) 홍명구 충렬비(洪命耉忠烈碑)가 세워졌으며 홍명구가 전사한 터에 1650년(효종 1) 김화 사람들이 충렬사(忠烈祠)를 세웠다.

[건립 경위]

홍명구 충렬비홍명구가 전사한 9년 후인 1645년 5월 세워졌다. 유림장군 대첩비와 동일한 형태로 나란히 서 있으며 김화 주민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위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학사리에서 국도 제43호를 따라 생창리를 지나면 민통선 초소가 나온다. 초소 왼쪽 농로를 따라 100m 가량 가면 충렬사가 나오는데 홍명구 충렬비충렬사 앞에 유림장군 대첩비와 나란히 서 있다.

[형태]

홍명구 충렬비는 이중 기단 위에 세워졌고 비신 높이는 195㎝이고 폭은 90㎝, 두께 21㎝이다. 비석받침은 가로 118㎝, 세로 62㎝, 높이 28㎝이다. 비석받침 윗면에는 연화문을 장식하였고 오른쪽 면에는 사람 얼굴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규석과 화강암 재질의 돌로 만들어졌다.

[금석문]

홍명구 충렬비는 앞면에 ‘평안도관찰사 홍공명구 충렬비(平安道觀察使洪公命耈忠烈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 ‘숭정후을유오월 립(崇禎後乙酉五月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홍명구 충렬비는 비신의 좌우가 총탄으로 많이 파괴되어 있고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의의와 평가]

홍명구 충렬비는 병자호란 당시 유일한 승전으로 평가되는 김화 백전 전투에서 청나라 대군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홍명구를 기리기 위하여 김화 지역 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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