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566
한자 柳琳將軍大捷碑
영어공식명칭 General Yoorim Battle Monument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길 603[읍내리 63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원미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44년 10월연표보기 - 유림장군 대첩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81년 - 유림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643년 - 유림 사망
현 소재지 유림장군 대첩비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지도보기
성격
양식 비좌원수(碑座圓首)형
관련 인물 유림
재질 규석|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201㎝[비신 높이]|90㎝[비신 폭]|24㎝[비신 두께]|142㎝[비석받침 가로]|82㎝[비석받침 세로]|10㎝[비석받침 높이]

[정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에 있는 병자호란 당시 대승을 거둔 조선 후기 무신 유림의 무훈을 기리는 비.

[개설]

유림(柳琳)[1581~1643]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字)는 여온(汝溫),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1609년 훈련도감 초관(哨官)에 제수되었고, 1611년(광해군 3) 이성현감(利城縣監)과 이산군수(理山郡守)를 지냈다. 1618년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619년 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가 되어 해주성(海州城)을 쌓고 정비하였다. 1630년 평안도 가도(椵島)에서 발생한 유흥치(劉興治) 등의 난을 평정하고 영변부사(寧邊府使)를 거쳐 1634년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이후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포도대장(捕盜大將),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등의 요직을 거쳐 1636년 다시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해 홍명구(洪命耈)와 함께 청나라 군대에 맞서 김화 백전 전투에서 승리하고 남한산성으로 가려고 춘천에 이르렀으나 이미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터라 진군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통제사(統制使) 등을 역임하였고, 인조는 유림 장군이 두 번이나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므로 좌의정에 추층하였다. 유림장군 대첩비(柳琳將軍大捷碑)는 1644년(인조 22) 10월 김화 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건립 경위]

유림장군 대첩비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유림 장군이 출정하여 대승한 김화 백전 전투 승리를 기리기 위해 1644년 10월 김화 주민들에 의해 충렬사 앞에 세워졌다.

[위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학사리에서 국도 제43호를 따라 생창리를 지나면 민통선 초소가 나온다. 초소 왼쪽 농로를 따라 약 100m 가면 충렬사가 나오는데 유림장군 대첩비충렬사 앞에 홍명구 충렬비와 나란히 서 있다.

[형태]

유림장군 대첩비는 비의 머리 부분이 둥근 모양인 비좌원수(碑座圓首)형이다. 비신(碑身)의 높이는 201㎝이고, 폭 90㎝, 두께 24㎝이다. 비석받침은 가로 142㎝, 세로 82㎝, 높이 10㎝이다.

[금석문]

유림장군 대첩비의 앞면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 유공림대첩비(平安道兵馬節度使柳公琳大捷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숭정후갑신십월 립(崇禎後甲申十月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유림장군 대첩비는 비신에 6·25전쟁 때 생긴 총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유림 장군은 병자호란 당시 유일한 승전으로 평가되는 김화 백전 전투에서 청나라 대군에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둔 인물이다. 유림장군 대첩비는 김화 지역을 빛낸 인물인 유림 장군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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